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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 (청음실, 대화, 약속)

생활나침반- 2026. 10. 1. 04:18

목차


    여행 중 기차 옆자리에 앉은 낯선 사람과 이야기가 너무 잘 통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내일 아침이면 서로 다른 나라로 떠나야 하는데 말이에요. 비포 선라이즈는 딱 하루 동안 낯선 도시를 함께 걸은 두 젊은이의 이야기예요. 대단한 사건 하나 없이 걷고 이야기하는 것뿐인데 서른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인생 영화로 꼽아요. 어렸을 당시에 봤다면 이해도 안 가고 지루했을 영화인데 지금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잔잔하게 생각이 많이 났던 영화였어요.

    비포 선라이즈 기차 안의 첫 만남

    프랑스 대학생 셀린은 할머니 댁에 다녀오는 길에 기차를 타고 있어요. 옆자리 부부가 큰 소리로 다투자 셀린은 조용한 자리로 옮기지요. 그 건너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미국 청년 제시예요. 두 사람은 우연히 말을 섞기 시작하고 식당 칸으로 옮겨 이야기꽃을 피워요. 솔직히 저도 기차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이어폰부터 끼는 편이라 셀린의 여유가 부러웠어요.

    제시는 다음 날 아침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어요. 기차가 비엔나에 멈추자 제시는 용기를 내 셀린에게 엉뚱한 제안을 해요. 여기서 함께 내려 밤새 도시를 걸어 보자고요. 나중에 나이 들어 오늘을 떠올리며 후회하지 않게 하자면서요. 잠시 고민하던 셀린은 가방을 들고 기차에서 내려요. 제가 직접 다시 보니 제시가 기차에서 내리자고 말하는 순간의 떨리는 목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크게 들렸어요.

    비포 선라이즈 여섯 달 뒤의 약속이 관객 마음에 남긴 변화
    비포 선라이즈 여섯 달 뒤의 약속이 관객 마음에 남긴 변화

    음반 가게 청음실의 어색한 눈빛

    이 영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면은 뜻밖에도 아무 대사가 없는 장면이에요. 두 사람은 작은 음반 가게에 들어가 좁은 방에서 함께 노래를 들어요. 이런 방을 청음실이라고 해요. 청음실은 음반을 사기 전에 미리 노래를 들어 볼 수 있도록 마련한 작은 방이에요.

    노래가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몰래 바라보다 눈이 마주칠 것 같으면 얼른 딴 곳을 봐요. 좁은 방 안의 어색하고 설레는 공기가 화면 밖까지 전해지지요.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봤을 법한 그 떨리는 순간을 이렇게 잘 담아낸 장면은 드물어요. 솔직히 아무 말 없는 장면이 이렇게 두근거릴 줄은 예상 밖이었어요.

    걷고 또 걷는 대화 중심 영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대화로 채워져 있어요. 사랑과 죽음과 부모님과 어린 시절 이야기까지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지요. 이렇게 큰 사건 대신 인물들이 나누는 말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영화를 대사 중심 영화라고 해요.

    카메라는 비엔나 거리를 걷는 두 사람을 멀찍이 따라가며 오랫동안 끊지 않고 찍어요. 이렇게 한 장면을 자르지 않고 길게 이어 찍는 방법을 롱테이크라고 해요. 덕분에 관객은 두 사람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세트장 대신 실제 비엔나의 골목과 다리와 카페에서 찍어서 도시 풍경을 구경하는 재미도 커요. 제 경험상 이 영화는 산책하듯 틀어 두고 두 사람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끝나 있을 만큼 편하게 볼 수 있었어요.

    카페에서 두 사람이 친구에게 전화하는 척하며 서로에 대한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도 유명해요. 손가락으로 전화기를 흉내 내며 상대에게 차마 직접 하지 못한 말을 전하는 모습이 귀엽고도 뭉클하지요. 해 질 무렵에는 놀이공원의 커다란 관람차에 올라 붉게 물든 도시를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입을 맞춰요. 제가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한참 웃다가도 마지막 한마디에서는 괜히 가슴이 찡했어요.

     

    비포 선라이즈 여섯 달 뒤의 약속

    해가 뜨면 헤어져야 하는 두 사람은 전화번호도 주소도 주고받지 않기로 해요. 대신 여섯 달 뒤 바로 이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지요. 기차가 떠나고 두 사람이 함께 걸었던 거리와 벤치와 공원이 텅 빈 채로 하나씩 비춰져요. 불과 몇 시간 전 두 사람이 있던 자리라서 더 쓸쓸하게 느껴져요.

    전화번호 대신 남긴 건 약속 하나였어요. 여섯 달 뒤 같은 기차역에서 만나자는 약속이요.

    과연 두 사람은 다시 만났을까요. 그 답은 다음 이야기에서 조금씩 드러나요. 이 영화는 아홉 해 간격으로 두 편이 더 만들어져 세 편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되었어요. 무려 열여덟 해에 걸쳐 같은 배우들이 같은 인물을 연기했지요 (출처: 에스비에스 뉴스). 에스비에스 뉴스 기사 보기 이렇게 세 편이 하나로 이어지는 작품을 삼부작이라고 해요.

    이 영화는 우리나라 개봉 서른 해를 맞아 올여름 씨지브이에서 단독으로 다시 상영됐어요. 세월이 흘러도 로맨스 영화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작품이에요 (출처: 뉴스핌). 뉴스핌 재개봉 기사 보기 다음 여행에서는 휴대전화를 잠시 내려놓고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그 대화가 평생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어 줄지도 몰라요.

    자주 묻는 질문

    비포 시리즈는 어떤 순서로 보면 되나요

    비포 선라이즈를 먼저 보고 그다음 비포 선셋과 비포 미드나잇 순서로 보면 돼요. 실제로 아홉 해씩 지나 만들어져서 배우들이 함께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영화 속 장소에 가 볼 수 있나요

    네 두 사람이 탄 관람차와 걸었던 다리와 골목은 지금도 비엔나에 그대로 있어요. 영화 속 장소를 따라 걷는 여행 코스를 즐기는 사람도 많아요.

    대화만 나오는데 지루하지 않을까요

    큰 사건은 없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가 워낙 솔직하고 재미있어서 금세 빠져들게 돼요.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는 영화예요.